파파라치님의 이글루



2018/05/25 09:03

남북회담 취소 관련 세상보기

일단 드는 생각은 “북한이 과연 몰랐을까?”하는 점이다.
사람은 목숨이 달린 일에는 조금은 현명해지는 법이다. 김정은은 몇년째, 아니 선대부터 치면 수십년째 생존을 걸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트럼프가 저렇게 나올 가능성을 몰라서 펜스를 비난하고 막말을 늘어놓았을까. 오히려 폼페이오와의 면담 등을 통해 양측의 의견 차이가 현시점에서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았기 때문에 어그로를 끌며 명분을 제공한 것은 아닐까.

트럼프는 문재인과의 면담 직후에 북미 회담 취소를 발표함으로써 대놓고 물을 먹인 셈이 되었는데, 이것이 문재인 정권에 대한 경고 메시지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문재인이 국제 외교라는 것에 대해 조금은 실감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양측이 진심으로 북핵 문제의 해결을 바란다면 이번 사건은 협상 과정에서 흔히 있는 기싸움이자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다. 진심으로 우려되는 것은 과연 양측의 견해 차이가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냐는 것이다.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핵의 보유는 대외적으로든 대내적으로든 말그대로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포기가 불가능하며, 만약 핵포기라는 옵션을 받아들였을 경우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해야할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는다. 반면에 미국의 입장에서 북의 핵보유는 오바마 정권 때처럼 무시할 수 있을지언정 절대 용인할 수는 없는 사안이며, 전략적 인내 따위의 옵션을 쓰기에는 이미 북한이 너무 많이 나가버린 상황이다. 여기서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대충 넘어가기에는 국내외, 특히 의회의 시선이 너무 따갑다.

어떤 이슈가 해결될 수도, 무시될 수도 없다면 보통 해답은 하나 뿐이다. 이 현실을 직시할 용기를 가져야 할 때다.

2018/05/21 07:59

10분의 의미

아침에 출근하다가 출출해서 식당에 들렀는데
이제 막 영업 준비하는 아주머니께서 말씀하길
“10분 정도 걸립니다”

내가 왜 그 “10분”을 시계로 측정되는 시간으로 착각했을까!

2018/05/19 12:58

희생의 증명력 독서 note

... 성직자들은 수천 년 전에 이 원리를 발견했다. 수많은 종교의식과 계명의 근저에 이런 원리가 깔려 있다. 신이나 국가 같은 상상의 실체를 믿게 하려면, 사람들이 가치 있는 뭔가를 희생하게 해야 한다. 희생이 고통스러울수록 그 희생을 바치는 대상의 존재를 더 확실히 믿게 된다. 값비싼 황소를 제우스에게 바치는 가난한 농부는 제우스가 실존한다고 확신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의 어리석은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 농부는 과거에 황소들을 바친 일이 헛되지 않았다고 믿기 위해 거듭해서 황소를 바칠 것이다. 정확히 같은 이유로, 만일 내가 조국 이탈리아의 영광을 위해 자식을 바쳤거나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내 다리를 바쳤다면, 나는 그 일만으로도 열렬한 이탈리아 민족주의자 또는 열정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다. 이탈리아의 민족신화나 공산당 선전이 거짓이라면, 내 자식의 죽음이나 내 부상이 헛되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할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p415



그가 바친 희생의 크기가 그의 주장의 진실성을 증명한다는 증명 불가능한 이 원리는, 586들이 왜 그렇게 그들의 "민주화 경험"을 신성시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본다. 그들 중 실제로 고문이나 투옥을 당한 이들이 극소수일지라도 말이다.

2018/05/19 12:30

진보의 의미 독서 note

... 2015년 1월 7일, 이슬람교 광신도들이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애브도>가 선지자 무함마드의 풍자화를 실었다는 이유로 그 잡지사의 직원 여러 명을 학살한 일이 있어다. 이 일이 있고 한동안 이슬람 단체들은 그 공격을 비난했으나 "하지만"이라고 덧붙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예를 들어 이집트 기자연합은 테러범들이 폭력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비난했지만, "전 세계 수백만 이슬람 교도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며 일제히 그 잡지사를 비난했다. 그들이 신의 뜻에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잡지사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라. 이런 일을 우리는 진보라고 부른다.

-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p314 -

2018/05/12 21:15

39년, "영국은 왜 유화정책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38년, "영국은 왜 유화정책을 선택했는가?"



역사를 배우는 이점 중의 하나는, 당시로서는 알 수 없었던 결과로부터 현재 우리의 선택의 결과를 예측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트랙백한 글은 왜 38년의 영국이 "합리적으로" 히틀러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한 이유를 열거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영국이 전쟁에 뛰어들기로 한 39년 9월에도 그 이유들은 전혀 달라진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단 한가지를 제외하고 말이다.


1. 경제적 배경

38년의 영국은 또 한번의 전쟁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39년의 영국도 그러했다.

2. 영국내의 반전여론

유일하게 바뀐 부분이다. 다른 조건이 동일한데 한 가지 변수가 바뀌었다면, 그 바뀐 변수가 원인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즉, 영국은 여론이 바뀌었기 때문에 정책을 바꾸었다! 정말? 홍준표가 왜 그렇게 여론을 바꾸려고 애쓰는지 이해가 된다

3.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영국 정부의 입장

38년의 영국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게 지나치게 가혹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39년에 그것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이 가혹했는지에 대한 해석이 전쟁 여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되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엄연한 주권국인 체코의 영토를 요구하는 것이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수정"이랄 정도로 너그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폴란드의 단치히에 대한 독일의 요구도 마찬가지로 너그럽게 해석될 수 있을 법하다.

4. 믿을만한 동맹국의 부재.

38년 영국의 동맹국들은 믿음직스럽지 못했고, 미국은 개입을 거부했으며, 소련은 빨갱이였다.
39년 영국의 동맹국들은 여전히 믿음직스럽지 못했고, 독일에 대한 예리한 쐐기가 될 수 있었던 동맹국 하나(체코)는 사라졌으며, 미국은 여전히 개입을 거부했고,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5. 영국군의 준비 부족
38년의 영국군은 전쟁을 치러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39년의 영국군은 공군력에 있어서는 다소 개선이 되어 있었으나, 여전히 대규모 지상전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38년과 39년 사이에 가장 비약적으로 군사력이 개선된 나라는 바로 독일이었다. 거기에는 체코로부터 강탈한 무기와 (무엇보다도) 금고가 큰 도움이 되었다.

6.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38년 당시 영국의 지배 계층은 소련을 불신했다.
39년 당시에도 영국의 지배 계층은 소련을 불신했고, 그 틈을 타서 히틀러는 스탈린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7. 대영제국에 대한 근심.

38년 당시 영국은 극동과 지중해, 유럽에서 3면 전쟁을 치르는 사태를 두려워했다.
39년 당시에도 영국은 극동과 지중해, 유럽에서 3면 전쟁을 치르는 사태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38년에 영국을 유화정책으로 이끌었던 논리적인 이유들은 39년에도 하나도 나아진 바가 없었다.
따라서 38년의 판단이 옳았다면 39년에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어야 했다. 실제로 히틀러는 영프가 전쟁에 개입할 리가 없다고 확신했고, 영프의 선전포고에 기겁했다.

그런데도 영국은 39년에는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하기로 결정했고, 이후의 사태는 위의 우려가 근거있는 것이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1. 영국은 2차대전을 통해 경제적으로 파산했다. (랜드리스가 없었다면 종전까지 전쟁을 지속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3. 아직도 많은 역사가들은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지나치게 가혹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예 나라가 해체된 오헝 제국이나 오스만 터키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게 함정 냉정하게 말하면 "독일을 포기시키기에는 너무 관대하고, 독일을 포용하기에는 너무 가혹했다"는 것이 정답이겠지만.
4. 영국의 동맹국들은 본격적인 지상전이 시작되자마자 독일에 무릎을 꿇어 영국의 불신이 정당함을 입증했다. (물론 이는 독일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지만, 그것이 위안이 될 수는 없다)
5. 영국군 스스로도 덩케르크의 기적이 아니었다면 전쟁 초기에 지상군 전력을 거의 상실할 뻔했다.
6. 전쟁 후  발트해의 슈체친에서부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다.
7. 대영제국은 해체되었다. 더이상 제국의 딜레마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만세!



그렇다면 합리적인 체임벌린은 39년 9월에도 유화정책을 선택했어야 하는가? 예를 들어, 폴란드에게 단치히를 독일에게 넘겨주도록 권유하고, 영국은 독일의 침략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통고했어야 하는가? 만약 여기에 대한 답이 "아니오"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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