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9월 23일
학부시절 수업시간에 들은 이야기.
1. 뇌를 파는 상점에 수학자, 물리학자, 경제학자의 뇌가 올라와 있었다.
그 중 경제학자의 뇌가 가장 비쌌는데, 그 이유는?
1) 별로 사용하지 않은 신품이기 때문에
2) 그만큼의 뇌를 모으기 위해 죽여야 하는 경제학자의 수가 많아서 (-_-;;;;;)
2. I.Q.에 따라서 정해지는 대화 주제
1) I.Q 160 이상 - 상대성 이론
2) I.Q 130 이상 - Field Theory
3) I.Q 100 이하 - 경제학...
3. 경제학자와 기상예보관의 공통점, 차이점
- 공통점 : 둘다 알지도 못하는 내일에 대해 예언한다(예보관은 날씨를, 경제학자는 내일의 경제를)
- 차이점 : 기상예보관은 최소한 오늘의 날씨는 알고 있다.
4. 신과 악마
- 첫째날, 신이 태양을 창조했다.
그러자, 악마는 그을음(sun-burn)을 창조했다.
- 둘째날, 신이 섹스를 창조했다.
그러자, 악마는 결혼제도를 창조했다(-_-;;;)
- 셋째날, 신은 경제학자를 창조했다.
악마는 고민했다. 과연 경제학자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의 결과 악마가 창조해낸 것은....
두번째 경제학자(second econpmist)였다.
(註 : Monetarist와 함께 죽을 수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했던 어느 Keynezian의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7~80년대 통화주의 논쟁의 와중에 생겨난 농담)
# by 파파라치 | 2008/09/23 14:53 | 트랙백
2008년 09월 12일
흔히 세상의 불공평함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노력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인정할 수 있지만(그것도 일체의 편법적 수단을 동원한 바 없이 깨끗하게 돈을 벌었다는 전제 하에서) 부모 잘 만난 덕분에 부자가 된 사람들은 인정할 수 없다고들 한다.
과연 그럴까?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또다른 말로 "벼락부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자수성가"와 "벼락부자"는 그 어감에 있어서 "상인"과 "장삿꾼"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거리가 멀다. 하지만 가난에서 몸을 일으켜 당대에 부를 일구어 낸 사람이라면 "벼락부자"라고 부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벼락부자"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인상을 생각해 보자. - 거만함, 사치, 과시적 소비, 기부에 인색함, 천박함... 근면함, 노력, 불굴의 의지,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 등의 단어들을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적당히 겸손할 줄 알고, 소비에도 절제가 있으며, 아낌없이 기부할 줄 알고, 문화적 소양도 뛰어난 이들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사람보다는 대대로 귀족이거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 즉 "귀골"에게서 발견되기 쉬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부족함이란 걸 맛보지 못한 이들은 과시적 소비로 보상받아야 할 열등감도, 재산에 대한 악착같은 집착도 없으며, 오랜 지배계급의 "노하우"로 적절한 수준의 기부는 민중의 적대감을 완화시키는데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특히, 고급 문화에 대한 이해는 어렸을 적부터 거기에 친숙한 환경에서 자란 이가 아니면 습득하기 어려운 능력이다. 자수성가한 "벼락부자"가 이런 자질들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자수성가"한 "벼락부자"야말로 경제를 일으키고 사회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이들이다. 실리콘 밸리의 "벤처 사업가"들이 바로 그런 부류가 아니던가. 이들의 활력과 모험심이 필요하다면 그들의 천박함과 무례함에는 어느 정도 눈을 감을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사회가 안정화 될수록 이런 종류의 "벼락부자"는 점점 찾아볼 수 없게 되겠지만 말이다.
사족으로, 우리나라 부유층의 일반적인 천박함은 그 역사가 일천하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한국전쟁의 난리통에서 똑같이 피난생활한 사람들 중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아니던가. 유난히 남과의 비교를 좋아하는 우리의 성향상, 부자에 대한 유난한 질투와 적개심은 일견 이해가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특히나 그들의 근본이 우리와 별다를 바 없다고 생각되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빌게이츠가 몇백억 달러를 벌든 내 알바 아니지만, 옆집 철이가 돈벼락을 맞는 것은 눈뜨고 못보는 것이 인간의 성향이니까.
# by 파파라치 | 2008/09/12 11:34 | 세상보기 | 트랙백
2008년 09월 11일
시민의식은 문화다어렸을 적 감명깊게 본 영화인 "시네마 천국"에서는, 1950년대 이태리 시골마을의 영화관의 모습이 친근하게 그려진다. 거기에 등장하는 "시네마 천국"(극장 이름이다)의 관객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매너와는 거리가 멀다. 조용히 옆사람 방해하지 말고 영화 감상에만 집중해야 하는 멀티플렉스 영화관과는 반대로, 시네마 천국의 관객들은 큰소리로 떠들고 왁자지껄하게 소리지르며 울고 웃는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관객의 수준낮음에 눈을 찌푸린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곳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시네마 천국의 관객들에게 영화 감상이란 스크린만 큰 TV를 보는 개인적인 행위가 아닌, 소통하고 함께 즐기는 축제에 가까운 행위다. 그런 그들에게 조용히 스크린만 보고 있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카니발을 얌전히 즐기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소리일 것이다.
어느 사회에나 나름의 규칙이 있다(보통 그것을 "문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규칙은 외부인이 보기에는 불합리하고 불쾌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 구성원들이 불편해하지 않고(물론 100% 누구에게나 불편하지 않은 규칙이란 없을 것이다) 나름의 이유를 가진 것이라면 그 규칙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수의 심리이다. 전부터 나는 진명행님이 보수라기보다는 우파에 가깝고 나는 우파라기보다는 보수에 가깝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 글에서 확연히 느끼게 된 것 같다. 물론 보수와 우파는 종종 동의어로 쓰일 정도로(나도 여러 글에서 두 개념을 혼용해왔다) 외연이 겹치기는 하지만,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주요한 모순점은 불합리한 규칙보다는 대다수가 공유하는 규칙이 없다는 것에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차 객석이라는 공간에서 보다 중요시되는 것이 마음놓고 먹을 권리인지, 아니면 쾌적한 환경인지에 대해 분명한 합의가 없으니 문제라는 것이다. 진명행님같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는 이들이 극소수라면 "한국의 문화"에 대한 몰이해를 질타했겠지만(거기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이 불쾌감을 느끼더라도 그것은 그의 문제이지 승객들의 문제는 아니다), 상당수가 기차라는 공적 공간은 냄새와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반면, 그보다 더 많은-어쩌면 아닐지도?- 이들이 현재 정도의 냄새나 소음은 그다지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친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지배적인 규칙이 없으니 탈선은 조장되고(상대편이 보기에는) 결론은 "빌어먹을 국민성"으로 귀결된다.
워낙 단기간에 서구화와 근대화가 진행되다 보니 근대와 전근대의 규칙이 혼용되고, 국가가 개개인의 삶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개약진"하며 "먹고 살아야 할 권리"가 다른 사회적 규칙에 우선하는 삶을 살아온 나라에서 누구나 동의하는 사회적 규칙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그리고 복날에 삼계탕집 앞에 줄을 서거나 추석에는 꼭 고향에 가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하지 않을지언정, 그들의 사고방식을 꼭 후진적이라고 비웃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에티켓은 칼같이 지키면서 개똥은 당연히 청소부가 치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프랑스인이나, 하나마찌 기간에는 공원 전체가 돗자리로 뒤덮히는 일본인을 후진적으로 비웃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어느 쪽이나 유머러스한 비꼼 정도라면 몰라도 그렇게 날선 비판을 할 만한 일은 아니다.
다만 사회적 합의 내에서 여유와 자유스러움을 찾는 것과, 이기적으로 자기에게 편한 것만 찾는 것은 구분되어야 하겠지. 내가 보기에도 후자의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좀 많아 보이는 건 사실이다. 한국인들이 대체로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 다들 마음의 여유를 찾으시기를...
# by 파파라치 | 2008/09/11 16:39 | 세상보기 | 트랙백
2008년 08월 17일
자공이 정치에 대하여 여쭈자, 공자가 말하였다. " 양식이 풍족하고 군비가 충족하고 백성이 신뢰하는 것이다." 이에 자공이 "꼭 부득이하여 버린다면 이 셋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군비를 버릴 것이니라" 하였다. 다시 자공이 "부득이하여 나머지 둘 중 하나를 버린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하자, 공자가 이르기를, "양식을 버릴 지니라. 예부터 죽음은 항상 이어왔지만, 백성에게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성립할 수 없다"
子貢 問政 子曰 足食足兵 民 信之矣 子貢 曰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 何先 曰 去兵 子貢 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 何先 曰 去食 自古 皆有死 民無信不立
친일청산 논쟁을 보면서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논어의 이 구절이었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믿음"이 친일청산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느낀 것은 바로 친일청산을 놓고 나라가 갈라져 다투는 것 자체가 국민 사이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고 있는 듯하다. 박정희는 두드러진 친일행위를 한 적은 없지만 일제시대 황군 장교로서 복무한 경력은 그의 재직중에도 그러했고 그가 사망한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박정희뿐만 아니라 해방후 이나라를 주도한 숱한 정치가,기업가,문인,언론인들이 친일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박정희를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전직 핀란드 대통령인 만네르하임을 떠올렸다. 2차대전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차대전 전야에 벌어진 저 유명한 핀란드와 소련간의 "겨울전쟁"을 지휘한 핀란드군 총사령관 만네르하임의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아군의 20배가 넘는 소련군에 맞서 빈약한 무기와 병력으로 맞서 눈부신 전과를 올렸고(비록 패배했지만), 독일과 소련의 사이에서 미묘할 수밖에 없는 핀란드를 2차대전의 소용돌이에서 끝내 독립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던 핀란드의 영웅이 바로 만네르하임이다.
그의 경력에서 특기할 점은, 그는 바로 핀란드가 제정 러시아에 복속되어 있었을 당시 러시아의 엘리트 고위장교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발틱함대 소속 함장으로서 대한해협에서 도고제독이 이끄는 일본군과의 전투에도 참전했고, 자신의 배를 블라디보스톡에 무사히 안착시킨 공으로 무공훈장까지 받았다. 그후에도 그는 러시아 황제의 근위대 장교로 배속되는 등의 엘리트 코스를 거치다가 러시아 혁명후 고국인 핀란드로 돌아와 내전에서 좌파의 폭동을 진압하고 핀란드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우리네 "우파"들의 행적을 스케일만 조금 크게 해놓은 것과 똑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런 그를 핀란드인들은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국가의 지도자로 내세웠고, 그는 그런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과거 그가 충성을 다했던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비록 굴곡을 겪었지만 2차대전의 수라장 속에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지켜냈다. 만약 그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핀란드의 독립은 1993년(소련붕괴) 이후로 미루어졌을지도 모른다. 2차대전 종전 후 만네르하임은 핀란드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그는 지금도 핀란드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만네르하임의 처세는 고국 핀란드에 대한 배신과 영합 사이를 전전한 모리배의 그것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총독부나 일본 정부에 종사한 인물들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러하다. 러시아군에 복무하는 대신 핀란드 독립군을 조직하여 러시아에 맞서 싸우는 것이 더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핀란드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구 400만도 안되는 핀란드가 인구 1억이 넘는 러시아에 힘으로 맞선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장 독립을 쟁취할 수 없는 바에야 일단 러시아의 통치에 복종하면서 언젠가 다가올 독립의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한다면 나라가 존재할 수 없기에, 능력과 적성에 따라서 러시아의 군인이나 관리로 복무하되, 자신이 핀란드 인이라는 사실만은 잊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으로 인정했던 것이다.(물론 실제 그런 사람들을 보는 평범한 핀란드인들의 마음은 좀더 복잡했으리라) 그리고 실제로 독립의 순간이 찾아오자, 그들 "핀란드인"들은 조국 핀란드를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함으로써 그들의 과거를 벗어던졌다.
2차대전 중의 핀란드의 외교와 군사전략을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위태롭기 그지없는 상황하에서 교묘하게 균형을 잡으면서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굴욕적일만큼 유연하게 대처하는 정치지도자와, 그런 그들을 신뢰하고 목숨을 던져 조국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국민들의 모습이다. 일개 병사라도 그들의 조국이 처한 미묘한 상황과, 지금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적과 내일이라도 타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은 과연 그런 상황에서 지금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지 회의를 느끼고, 이처럼 "무의미한" 전투를 강요하는 국가지도자들에게 불평을 터뜨렸으리라. 그리고 어제까지 피흘려 사수하던 지역을 적국과 체결한 화평조약에 의해 포기해야 하는 현실에 항명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저히 승산이 없을 것 같은 적과 내일이면 화평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생명을 버려가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웠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조국에 최선의 이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납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전선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과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순간에도, 자신들의 지도자들이 국가를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믿음이 아니었더라면 그토록 유연한 외교정책과 그토록 투지넘치는 필사적인 항전의 결합은 불가능했으리라.
핀란드인들은 지배자의 정부에서 관리로, 군인으로 일하는 동포들도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해방된 조국에서 핀란드를 위해 봉사하리라는 믿음을 가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만네르하임과 같은 우리네 시각으로는 배신자나 다름없는 인물을 조국의 총사령관으로 내세웠고, 그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조국을 지켜내어 오늘날까지도 추앙받는 영웅이 되었다. 오랜 피지배의 세월을 거치면서 항전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내면으로는 결코 굴복하지 않고 핀란드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그들이기에 바로 그런 믿음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예전에 누군가가 친일파는 일시적인 굴욕을 견디고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익혀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자 했던 사람이라고 글을 써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글에도 어느 정도의 진실은 있다고 생각한다(다는 아니지만). 인간성의 복잡함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의심의 여지없이 강고해 보이는 일제의 식민통치란 상황하에서 능력과 야심이 있는 젊은이가 양심과 현실사이에서 겪었을 고민을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으리라. 비록 그런 어려움이 일제에 부화(附和)하여 동포를 탄압하고 참전을 선동한 명백한 잘못까지 덮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핀란드와 달랐던 점은 그처럼 식민통치에 협력한 사람들이 영구히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민족에 봉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일제에 부역하면서도 가능한한 동포의 편에 서서 일하리라는 믿음이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은 외세에 굴복하는 자들은 현실을 감안해 조국을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가문과 일신의 영달을 위해 외세에 부합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멀리는 고려말기 원나라를 업고 권력을 장악했던 권문세가(權門勢家)에서부터 가까이는 조국보다는 일본이나 미국을 더 사랑하는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조국을 위해 외세를 "이용"하기보다는 자신과 가문을 위해 조국을 외세에 팔아넘겼던 것이다. 그런 지도층의 모습을 수없이 보아온 이나라 민중들이 이유야 어찌되었건 외세에 부역한 이들을 분노없이 바라보기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가 어떠한 일을 하고 있으며 어떠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건, 자기 위치에서 나름대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리라는 믿음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은 오랜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도 우파는 좌파를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포퓰리즘에 의존하는 선동꾼에, 심지어 김정일의 동조세력 정도로 의심하고, 좌파는 우파를 친일, 친미세력의 후예로 국익보다는 외세의 이익에 동조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민중을 총칼로 짓밟는 짓도 서슴치 않는 무리 정도로 생각한다. 각기 입장은 다르지만 국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동포라는 의식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심은 사실 상당부분 근거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대립은 끊이지 않고, 대화와 타협은 멀기만 한 것이다.
길기만 하고 별로 내용없는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은 것 같다. 나는 굳이 여기서 무슨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두에 인용한 공자의 가르침, 즉 한 나라가 나라로서 서기 위해서는 국민과 정부간, 그리고 국민과 국민간의 신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것이 얼마나 결여되어 있었나를 말하고 싶었다.
요즘처럼 물질주의가 풍미한 시대에 안보와 식량보다 국민의 믿음이 우선이라는 공자의 주장은 케케묵은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사회와 정치의 현실은 바로 믿음의 결핍이 얼마나 우리를 황폐화시키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저서 <신뢰(Trust)>에서 신뢰야말로 선진국이 되기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서 실종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술수와 편법을 거부하고, 정파주의의 폐단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할때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 by 파파라치 | 2008/08/17 16:08 | 트랙백 | 덧글(4)
2008년 08월 01일
촛불이나PD 수첩에 대한 사법처리를 보면, 이 나라 보수들의 초조함이 역력히 드러난다.
물론 형식적인 법논리로 보면 촛불 시위자들은 집시법 위반인 것 맞고, PD 수첩이 의도적인 왜곡 보도를 한 것은 맞다. 하지만 굳이 거기에 법의 잣대를 들어댈 필요가 있을까?
촛불 시위는 굳이 말하자면 2MB의 삽질이 초래한 대중적 현상이고, PD 수첩의 광우병 보도는 분명 악의적이지만, 조중동의 그것에 비해서 결코 정도가 심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물론 순수 민간 소유인 조중동과는 달리 MBC는 공영 방송이라는 차이는 있다)
촛불 시위는 2MB가 결국은 보수가 다수일 수 밖에 없는 대중을 향해 정직하고 성의있는 설득을 함으로써 풀어야 할 문제이고, PD 수첩 보도는 보수 언론이 설득력있는 반론 보도를 함으로써 풀어야 할 문제이다.
한마디로 정치적인 문제란 말이다.
강정구 교수에 대한 국가보안법 수사 당시에도 생각했지만, 매사에 공권력을 동원하려는 보수의 행태는 초조감에서 나오는 것 같다. 강정구야 만경대 정신 만세를 외치고 적화 통일을 저지한 미국의 개입을 비난하는 정신나간 인간이지만, 그에 대한 반박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런 학문적(?) 아젠다에까지 공권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이나라 보수 세력의 학문 역량은 형편없다는 것을 그들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지난 반세기, 우리 사회의 소위 “보수”들은 스스로의 정당성을 입증하기보다 반대파를 때려잡기만 하면 되었기에 생각하고 토론하는 능력이 퇴화되고 말았다. 반대로, 가진게 말과 글밖에 없었던 좌파들은 논리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우파와는 비할 수 없는 역량을 가진 것이 현실이다. 비록 좌파를 자처하는 이들의 상당수는 광우병 괴담에 놀아나는 한심한 아해들이라는 면에서는 우파와 오십보 백보지만, 적어도 대표적 학자들의 면면을 보면 우파는 좌파의 적수가 안된다.
논리 구축 뿐인가? 대중에 대한 호소력에서도 좌파는 단연 우파를 능가한다. 우파의 삽질이 원인이긴 하지만, 좌파는 이슈를 제기하고 대중적 공감을 획득하는데 탁월한 재주를 보인다. 오로지 이 사회에 만연한 천박한 물신숭배와 멍청한 우파들을 상대하면서 형성된 좌파의 자아도취에 대한 대중의 반감만이 사상전에서의 좌파의 공세를 저지하고 있을 뿐이다.
한심한 노릇이다.
이렇게 권력의 기저가 되는 논리력, 대중동원력, 학문적 역량 등에서 모두 좌파에게 되지는 우파가 기댈 것이라고는 그들이 가진 유일한 권력, 즉 공권력과 금력 뿐이다. 그러니 사상전, 언론전의 영역에서도 공권력을 동원하는 무리수를 두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리한 공권력의 적용은 좌파를 권력에 의해 탄압받는 속죄양으로 만든다. 이중으로 멍청한 짓이다.
좌파 학자를 국가보안법으로 잡아넣기 전에 그 논리를 박살낼(그리고 설득력있게 전파할) 우파 학자를 양성해라. 편향된 보도를 하는 언론을 검찰수사하기 전에 제대로 된 보도를 할 수 있는 언론인을 키워라. 부에 대한 천박하고 허황된 환상을 심어주는 것 말고,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을 키워라.
그럴 능력이 없다면 적자 생존의 법칙에 따라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진정 "우파적"인 처신이 아닐까 싶다.
# by 파파라치 | 2008/08/01 17:11 | 세상보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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