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라치님의 이글루



거장과 마르가리타 독서 note

거장과 마르가리타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민음사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이 유쾌하면서도 강한 여운을 남기는 책을 단번에 읽지 못하고 한달에 걸쳐 띄엄띄엄 읽은 것은
- 그래서 등장 인물의 이름을 잊어버려 진도를 나아가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 - 600 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쉽게 읽히지 않는 시대적, 문화적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지루한 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 반대로 대단히 흥미롭고 환상적이며 그러면서도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풍자를 박진감있는 문장에 담은,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정도 분량의 책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 한국의 직장인이 읽기에 다소 부담스럽기는 하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끝끝내 완독한 자신이 대견한 기분!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반체제적이라는 이유로 매장당하고 쓸쓸히 죽어간 작가의 이력을 알고 나니
작품중의 거장의 상황이 새삼 씁쓸하게 느껴진다.


<안자춘추>를 읽다가

<안자춘추>를 읽다보면, 안자가 가장 오랫동안 모신 경공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경공은 정치적 능력이 뛰어나지도, 도덕적 자제력이 탁월하지도, 지성이 우수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무능하거나 악하지도 않은, 한마디로 보통 사람이었다. 그는 안자가 하는 간언-이라고 쓰고 잔소리라고 읽는다-을 들어도 별 반응이 없을 때가 많았던 것 같지만, 안자가 특유의 퍼포먼스를 감행하며 일깨움을 줄 때는 이를 받아들일 줄 알았다. 사람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할 말을 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예가 안자라지만, <안자춘추>를 읽다보면 이런 사람을 곁에 둔 사람이 권력자라면 증뿔이 날 만도 할 것 같다. 하지만, 경공은 안자를 내치지 않고 곁에 두며 길거리에서 안자에게 고개를 숙일 만큼 그를 아끼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뚜렷한 자기주관은 없어도 진심어린 충고는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나는 아마 경공이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안자가 얼마나 진심으로 자신과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인지를. 물론 안자처럼 국내외에 명망이 높은 사람을 내치는 것 자체가 군주에게는 부담이었겠지만, 그런 정치적 고려 외에도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안자의 "진정성"을 사랑했을 것이다. 사실 안자는 탁월한 정치적 식견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정치적인 사람은 아니다. 정치적인 인간의 제1의 요건은 뚜렷한 목적의식이다.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정치적인 인간을 강하고, 때로는 주위사람이 경원하게 만든다. 그런데, 안자는 그런 사람이 되기에는 너무나,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정치적인 사람은 때로 친구로 삼기가 꺼려지지만, 안자는 친구를 잘 사귀었다는 사기의 기록처럼 친근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넘친다. 정치인으로서는 1% 부족한 그는 전(田)씨의 발호를 예견하면서도 이를 막지 못했고, 진(晉)-초(楚) 양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중간규모 강국으로 전락한 제나라를 환공 시대와 같은 패권국가로 되돌리지도 못했다. 그는 다만 군주로서는 50% 부족한 경공이 큰 실책을 저지르지 않도록 보좌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사랑받는 것과 경원받는 것 가운데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주저없이 경원받는 쪽을 택하라고 했다. 그의 말은 정치적인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고 있지만,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사회적 관계가 중요시되는 21세기에도 똑같이 적용되는지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타인을 위압하기보다 소통에 뛰어난 사람이 권력을 가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21세기라면, 안자는 진정한 21세기형 정치가의 사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요일 밤의 단상 飛上

인생은 슬프지도 허무하지도 않다. 삶은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광대한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점 하나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한순간이지만, 그 유한성이 필연적으로 슬픔과 허무함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슬프고 허무한 감정은 우리 마음이 그렇게 비추고 있는 것일 뿐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인 것이다.(一體由心造)

나는 아마 인간의 본연의 모습대로 자유롭게 살지는 못할 것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대붕(大鵬)처럼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그 숱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어떠하랴.  부처도 예수도 살아있는 동안에만 대중과 다를 뿐이다. 그들도 죽어서는 깨닫지 못한 자들과 똑같은 흙으로 화했을 뿐이다. 아니, 죽음과 삶이 다르지 않다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은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The woodchuck could say whether it's like his
 Long sleep, as I describe its coming on,
 Or just human sleep.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독서 note

"나는 보다시피 이런 인간이다 보니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여러 의미에서 차별받아 왔어"하고 오시마 씨가 말한다.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들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즉 쉽게 말하자면, 조금 전 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두 여성 같은 인간들이라구."
그는 한숨을 쉬고 손가락으로 긴 연필을 돌린다.
"게이든, 레즈비언이든, 정상인이든, 페미니스트든, 파시스트의 돼지든, 공산주의자든, 힌두교 신자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떤 깃발을 내걸든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아.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공허한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과 부딪히면 나는 참을 수가 없거든. 나도 모르게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말을 입에 담게 돼. 조금 전의 경우도 적당히 받아들이고 적당히 맞장구를 쳤으면 됐을 텐데. 아니면, 사에키 씨를 불러서 맡겼으면 됐을 텐데. 그녀라면 미소 띤 얼굴로 능숙하게 대처했을 거야. 그런데 나는 늘 그렇게 할 수 없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마구 하는가 하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버리거든. 나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어. 그게 내 약점이야. 어째서 그게 약점이 되는지 알겠지?"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을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하다가는 몸이 열 개 있어도 모자란다, 는 얘기인가요"하고 나는 말한다.
"그래, 맞아"하고 오시마 씨가 말한다. 그리고 연필의 지우개 부분으로 가볍게 관자놀이를 누른다. "정말 그래. 하지만 다무라 카프카 군, 이것만은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결국 사에키 씨의 연인을 죽인 것도 그런 인간들임에 틀림없어.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비관용성 독불장군 같은 계급투쟁의 운동 방침, 공허한 말들, 찬탈된 이상, 경직된 시스템. 내가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런 것들이야. 나는 그런 것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증오해.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가-물론 그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지. 그러나 그런 개별적인 판단은 혹시 잘못되었더라도 나중에 정정할 수 있어. 잘못을 스스로 인정할 용기만 있다면, 대개의 경우는 돌이킬 수 있지. 그러나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것이나 관용할 줄 모르는 것은 기생충과 마찬가지거든. 중간 숙주를 바꾸고 형태를 바꾸어서 끝없이 이어져 가는 거야. 거기에는 구원이 없어.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을 여기에 들여놓고 싶지는 않아."
오시마 씨는 연필 끝으로 서가를 가리킨다. 물론 그는 도서관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적당하게 웃어넘길 수 없어."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中


춘추전국 이야기 4권 『정나라 자산, 진짜 정치를 보여주다』 독서 note

p 139

역사가 생긴 이래로 우두머리들은 계속 바뀌어왔다. 굳이 '방벌'의 이론이 없더라도 지속적인 역성혁명은 역사적인 사실읻. 중요한 점은 우두머리, 곧 군주는 계속 바뀌었지만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의 권력은 계속 커졌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고대의 전제주의 사회보다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의 국가 권력이 훨씬 크다. 걸주(桀紂)가 아무리 폭군이라도 오늘날 북유럽의 가장 발달한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수입 중 50퍼센트를 세금으로 걷지 못했다. 기원전에는 어떤 국가도 오늘날 국가들처럼 조직적인 세계대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국가 권력이 지속적으로 커지는 경향은 군주들에게 착각을 심어주었다. 국가 권력이 커지는 것을 군주 개인의 권력이 커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들은 군주권이 커지자 '누가 감히 나를 넘어뜨리겠느냐'라고 착각해 행동한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강한 군주도 쓰러지며, 오히려 더 잘 쓰러진다.계속 강해지는 것은 군주 개인이 아니라 국가 자체였다.

- p 314

안영은 바름과 도의 목표를 백성의 궁극적인 복지에 두고 있다. 진실로 백성의 복지를 위한다면, 각박한 생활로 인해 마음이 흉폭해진 백성에 영합하는 대신 욕을 먹더라도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 위정자의 태도라는 것이다. 안영이 보기에 스스로 정도를 지킴으로써 백승의 마음을 고양시키지 않고, 오히려 백서의 이기심에 영합하는 지도자는 하급이다. 백성을 사랑한다면 백성보다 꼿꼿해야 한다. 그러니 안영은 정치의 요체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사기』「관안열전」이나 『안자춘추』에 의하면 그는 질척거리는 시장에 집을 두고 백성들과 어울리며, 나물 반찬에 대충 찧은 곡식을 먹으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초의 명신 손숙오처럼 검소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산이 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군주를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자연인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인은 악한 사람을 미워하고, 착한 사람을 표창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어려움에 처하면 시와 비를 명백히 따져서 어느 한 편에 서야 한다. 난리가 날 때마다 중립을 지킨다면 원칙으로 사람들을 이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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