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은 왜 부자를 위해 투표하나에 대한 이견

가난한 사람들은 왜 부자를 위해 투표하나


"긍정의 언어로 말하는 진보"란 형용모순에 가깝습니다. 긍정의 언어는 지켜야 할 대상이 존재할 때 가능합니다. 진보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는 것이죠. 현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바로 진보의 출발점이니까요. 대표적인 예로 맑스의 대작 자본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서 논하고 있지, 사회주의의 작동원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맑스가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언급한 것은 공산당 선언에 나와있는 행동강령이 전부죠). 신좌파에 이르면 타도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체제 그 자체"라는 주장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도, 진보주의의 속성이 가지는 필연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모든 제도는 억압적일 수 밖에 없다"는 명제를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존재하는 한 인간은 제도 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파는 제도의 불합리성이 수인 불가능에 이르지 않는 한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인내심(?)을 가졌다면 좌파가 아니죠. 좌파에게는 모순이 존재하는 사회(즉, 현존하는 모든 사회)는 기본적으로 타도와 전복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좌파는 현 체제를 타도한 후에 도래할 체제가 어떠한 것인지 분명하게 그려내지 못합니다. "평등, 자유, 연대, 소통"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구호가 아닌, 그 사회의 작동원리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사회의 물질적 자산은 누구에게 어떤 형태로 귀속되는지, 인민의 의사는 누가 대변하고 어떻게 반영되며 조정되는지, 권력은 어떻게 배분되며 누구에 의하여 행사되는지, 법의 지배는 어느 기관에 의하여 어떻게 관철되는지와 같은)는 너무 힘겹거나 혹은 너무 구차한 과제이기 때문이겠죠. 힘겹다는 것은 오랜 기간 숱한 시행 착오를 거쳐서 자리잡은 현 체제를 대체할 시스템을 상상력만으로 설계해 낸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고, 구차하다는 것은 그렇게 생각해 낸 체제 역시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인 만큼 모순을 안고 있을 수 밖에 없고 따라서 그 묘사가 구체적일수록 비판의 여지 역시 커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좌파가 그리는 이상적 사회상(예를 들자면, 자본의 끝머리에서 맑스가 그리고 있는 공산 사회의 모습)이 대체로 모호하고 감성적 언어로 묘사되는 것은 그 때문이겠죠.

"긍정의 언어로 묘사해야 할 새로운 체제"에 대한 뚜렷한(구체적인) 비전이 없으므로 좌파의 주요 과제는 현 체제의 비판일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언제나 부정의 언어로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좌파의 한계라면, 비난당할 구체적인 체제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비판으로부터 상당부분 자유로운 것이 또한 좌파의 이점이죠. 우파는 정확히 그 반대라고 보면 될 것이고.

참고로, 노무현의 비극은 기본적으로 중도 우파에 속하는 그가 좌파와 비슷한 부정의 언어로 말했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쉽고 명료한 언어로 말하는 대신, 안그래도 살기 피곤한 국민들을 향해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불어넣으려 했으니 진저리를 내는 것은 당연했죠. 물론 무책임하게 그런 인식을 확산시킨 주류 언론의 책임도 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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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harefeel 2008/09/09 13:39 # 답글

    파파라치님께선 허지웅님의 글에 대해서 이견을 적어주셨습니다. 조리있게 잘 적어주셨고 저도 잘 읽어보았습니다.
    하지만 허지웅님께서 사람들은 진보진영을 지지해야된다라고 말씀하시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진보진영을 지지 하지 않는 이유와 함께 진보진영의 잘못을 꼬집는 글을 쓰셨죠.
    따라서 파파라치님의 글은 허지웅님 글에 대한 이견이라고 볼 순 없을 듯 합니다.
    더해서 허지웅님께선 진보/보수 진영간의 관계에 한정해서 글을 적으셨는데 파파라치님께서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시면서 논쟁을 현실 세계로 끌어내리셨다는 측면에서 조금은 논점을 빗나간 글이 되버린 것 같습니다.
    이견이라는 제목을 보고 끌려서 왔는데 조금 실망한 마음에 댓글 적어봅니다.
  • 파파라치 2008/09/11 14:49 #

    허지웅님은 진보진영을 지지하고 있고, 또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입니다. 허지웅님이 그 글에서 주장한 것은 자신이 몸담은 진보진영이 대중에게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질타이지 진보 운동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허지웅님이 진보진영의 방법적 과오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사실은 진보라고 하는 이념의 본질적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고요. 그러니 허지웅님의 글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노무현에 대한 언급은 말미에 지나가는 이야기로 했을 뿐입니다. 노무현은 진보가 아니라는 점도 명확히 언급했고요. 논점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사족에 초점을 두는 님의 독법 역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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